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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 리뷰

'예술을 짓는 가마', 버지니아 토피도 아트 센터

2019-10-18

예술, 특히 미술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따분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미술을 전공하거나 관련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향유하는 고급문화로 인식한지 오래다. 그래서 예술을 흔히 '그들만의 리그'로 칭하기도 한다. 외부인의 시선에서는 유난히 아득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미술을 일상으로 끄집어낸 곳이 있다. 예술의 문턱을 낮춰 대중문화로 만든 버지니아 토피도 아트센터(Torpedo Factory Art Center)를 찾아가 본다.   

 


photo: torpedofactory.org

 


photo : torpedofactory.org

 

 

버려진 무기 공장이 예술의 산실로 탈바꿈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 올드타운에 가면 오래된 어뢰공장이 있다. 말 그대로 해군 무기인 어뢰를 제작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곳 무기 공장도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오랜 시간 흉물스럽게 방치됐던 곳을 알렉산드리아 시가 사들여 1974년부터 아트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살상무기나 만들던 음습한 곳이 문화예술을 낳는 산실이 된 셈이다. 이렇게 변신한지 올해로 45년째. 토피도는 이제 어뢰라는 사전적 의미보다 아트 센터라는 지명으로 더 익숙하다. 

 

이곳이 독특한 이유는 철저히 '예술가의, 예술가에 의한, 예술가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술가 마리안 반 랜딩햄(Marian A. Van Landingham)은 일찌감치 이 허름한 어뢰 공장에 주목했다. 애초에 3m가 넘는 거대한 어뢰를 만들기 위해 설계된 곳이기에 공장은 천정고가 높았다. 높은 천정고 덕분에 입구나 창문도 크게 지어졌다. 빛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공간이다. 대형 캔버스에 작업을 해야 하는 화가들, 대형 작품을 만드는 설치 미술가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커다란 화물 엘리베이터는 완성된 대형 그림이나 조각품을 옮기기에도 적합했다. 마리안이 묘안을 떠올렸다. 이곳을 가난한 미술가들을 위한 아트 센터로 만들어 싼값에 창작 공간을 임대해 주자고 제안했고, 알렉산드리아 시가 곧바로 추진하면서 '예술가의 요람'이 탄생하게 됐다. 아트 센터 개국 공신인 마리안은 오늘도 311호 자신의 작업실에서 환하게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45주년을 맞아 알렉산드리아 시는 그녀의 이름을 딴 반 랜딩햄 갤러리(Van Landingham Gallery)를 만들었다. 

 


photo: torpedofactory.org
 


Anna Yakubovskaya working, photo: torpedofactory.org
 


photo : torpedofactory.org

 

 

45년째 예술가와 관람객 잇는 역할 해
마리안은 아트 센터 설립 당시를 회상하면서, 원래 아트 센터는 3년 시한부 프로젝트였다고 고백한다. 예술가와 관람객이 만나자 죽은 도시가 다시 살아났고, 그 힘으로 반세기 가까이를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한다. 현재 토피도 아트센터는 165명의 예술가들이 서로 벽을 사이에 두고 모여 있다. 창작과 전시 공간을 구분하지 않은 점이 가장 큰 특징인데, 화가는 갓 완성한 그림을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자신의 스튜디오에 전시한다. 그리고 관람객들은 화가가 이젤 앞에 앉아 밑그림을 그리는 순간부터 그림을 벽에 거는 순간까지 모든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본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한 공간에 모여 각자 서로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점도 흥미롭다. 동지이자 경쟁자인 예술가들끼리 서로 예술적 영감을 나누며 함께 성장해간다. 사진, 유화, 도자기, 조각, 섬유공예, 뜨개질 작품 등 그야말로 모든 장르의 예술이 한데 모여 있다. 큐레이터나 아트 딜러 같은 중간자를 건너뛰고 예술가가 관람객과 직접 대면하기 때문에 거품 없는 합리적인 가격의 미술품 거래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곳에 모인 165명은 어떤 기준으로 선발될까? 토피도 아트 센터는 작년까지만 해도 스튜디오를 갖고 있는 예술가들로 구성된 예술가협회가 운영을 맡았다. 그러다 올해부터 알렉산드리아 시가 자체 운영하기로 했다. 매년 3명의 심사위원을 위촉해 입주를 원하는 예술가들을 심사한다. 심사 기준은 물론 입주 조건 또한 까다롭다. 정해진 일수 이상 스튜디오에 출근해야 하고, 창작활동 외에 숙식은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면서 관람객들과 소통에도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한 작가들만 선별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실력 있는 지역 작가들이 한데 모였으니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김현정 작가, photo: HYUN JUNG KIM 
 


Blind in art-Blind Fingers / Silver, Brass / 2005, photo: HYUN JUNG KIM

 

 

유일한 한국인 예술가 김현정
토피도 아트 센터에 스튜디오를 가진 유일한 한국인 조각가 김현정. 인간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시각 예술로 표현한 '블라인드 인 아트(Blind in art)'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그의 작품은 언뜻 보기에는 그저 아름답다. 그러나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보석과 점자, 글자가 뒤섞인 난해한 컨템포러리 미술에 가깝다. 이렇게 단순한 듯 어렵고, 간단한 듯 복잡한 것이 김현정 작가 작품의 매력이다. 김현정 작가는 서울대학교 조소과 학사와 석사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와 몬클레어 대학원에서 스튜디오 아트 석사를 마쳤다. 이후 뉴욕과 워싱턴 D.C.를 기반으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삶의 궤적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 세계는 한국에 있었을 때와 미국으로 건너온 뒤로 극명하게 나뉜다. 유학 초기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던 자신의 경험을 작품에 녹여 같은 시대를 살며 같은 공간에서 숨 쉬지만 말과 글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천태만상을 표현한다.  

 

Blind in art -Martin Luther King Jr. / Brass, Silver, Gems / 2016, photo: HYUN JUNG KIM

 

 

'블라인드 인 아트 시리즈'로 인간의 존재 가치 표현
'블라인드 인 아트' 시리즈는 손가락, 발가락으로 시작했다. 은으로 모형을 떠서 점자를 새겼다. 점자 내용은 고귀함, 아름다움, 탐욕과 같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현정 작가는 네일아트를 여성의 의무이자 필수로 여기는 미국의 생경한 문화에 착안해 매니큐어를 바른 손이든 바르지 않은 손이든 손톱이 길든 짧든 우리 모두는 존귀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후 왕관으로 발전시켜 장신구는 실제로 우리 몸에 착용할 때 의미가 채워진다는 진리를 역설한다. 그의 스튜디오 18호에 가면 누구나 왕관을 만지고 써볼 수 있다. 붉은 카펫과 진주로 장식된 벽이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 묘한 조화를 이뤄 그의 작업실은 토피도 아트센터의 사진 명당으로 꼽힌다. 

 


Blind in Art- “Love”/ Canvas, Pearls, Gold Leaf, Wine Dyed Silk String / 2018, photo: HYUN JUNG KIM

 


다문화와 다언어로 뒤섞인 현재를 언어로 시각화
'블라인드 인 아트' 시리즈는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사랑(LOVE)'을 주제로 한 작품이 인상적인데, 한글 사랑과 영어 love, 그리고 그 위에 영어 점자를 덧대 사랑이라는 같은 의미의 단어를 여러 언어로 겹쳤다. 수많은 패널들을 연결한 사랑 프로젝트는 다문화와 다언어로 뒤섞인 우리의 현실을 언어로 시각화했다. 인도+파키스탄, 우크라이나+러시아, 미국+멕시코 등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척을 지고 있는 나라들의 언어를 하나의 판 위에 공평하게 담아 시각적으로나마 화합을 이루고자 했다. 그의 작품은 주 유엔 대한민국 대표부에 헌정되기도 했다. 


김현정 작가는 관람객들이 작가의 제작 의도를 온전히 다 이해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저 금과 은, 진주, 토파즈 등 각종 보석들로 장식된 왕관을 쓴 사람들이 잠시나마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예술 작품을 통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 그것이 예술가의 사명일 테니까 말이다.

 

토피도 아트 센터는 연간 100만 명 이상이 찾아올 정도로 버지니아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그림 같은 포토맥 강가 풍광을 즐기러 나왔다가 자연스레 이곳의 수준 높은 예술 작품에 눈을 빼앗겨 버렸다는 관람객이 적지 않다. 예술의 용광로에서 자신만의 예술혼을 뽐내는 사람들, 그 열정과 영감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 그리고 문화예술이 곧 힘이라는 열린 생각으로 아낌없이 지원하는 사람들이 만나 새로운 전시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어느새 우리의 일상 속으로 불쑥 파고든 예술문화에 눈과 귀를 열고 한 발짝 다가가 보자.  

 

글_ 이소영 워싱턴 통신원(evesy02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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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 통신원
워싱턴 D.C.에 거주하며 여러 매체에 인문, 문화, 예술 칼럼을 쓰고 있다. 실재하는 모든 것이 디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보다 쉽고 재미있는 소식으로 디자인의 대중화에 앞장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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